그러나 하여령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대답을 듣지 못했으나 또 다시 묻고 있었다.‘으악! 드디어 음적에게.’하여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사부에게서 문제가 일어나다니, 절로 긴장됨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번엔 가능한 멀리 떨어져 누웠다.백선결은 젓가락만 만지작거리는 노팔룡을 바라보며 물었다.막비의 눈에서는 줄기줄기 무서운 신광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분노하기는 생전 처음이었다.“운하(雲瑕)는?”이때 청년의 말을 귓전으로 듣고 있던 하여령은 눈빛을 반짝였다.아직껏 한 번도 타인에게 보인 적이 없을 뿐더러 누군가가 만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가슴이었다. 그런데 노팔룡의 의해 닳도록 만져지고, 또 그뿐인가?그녀는 노팔룡의 입술로 흔적이 남도록 빨리기도 했고, 또 이빨로 가볍게 물어 뜯기기까지 했다. 그 자국으로 지금까지도 은은히 아픈 감각이 남아있지 않은가?마음 속에는 많은 의문이 있었으나 조금도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백선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주 앉은 도운하의 눈길은 지금 멀리 가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길섶의 바람에 지는 낙엽을 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는 잎을 잃고 있었다.그래서 그저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저 오늘 밤만은, 오늘 밤만은, 하면서.그의 변명을 듣는 동안 흑의녀의 표정은 더욱 차디차게 굳어지고 있 었다. 안면은 백지장이다 못해 얼음 가루가 풀풀 날릴 지경이었다.쐐애애 쐐애액!도무지 엉망친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괴노인은 노팔룡의 말에 춤추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권위나 신비함이 형편없이 구겨지고 있었다.‘그래. 더, 더 흔들어라. 그리고 애원해라. 이것이 너의 모습이다. 너도 역시 한낱 싸구려 창부에 불과한 계집이야!’천하무림의 운명을 짊어진 인간, 그런 그에게 한 명의 여인이 이토록 고독감을 안겨줄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글쎄 악당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무당 장문인 패엽도장이 나섰다.실심객의 신형이 연기처럼 흐려졌다. 당가 독문의 은형비(隱形飛)라는 경신술이었다. 은형비가 최상승에 이르면 인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특정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도 상대방은 전혀 기척을 느낄 수 없는 특수한 신법이었다.약초분은 곧 고약(膏藥)처럼 끈적한 상태가 되었다. 그것을 외상(外傷)에 어느 정도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서서히 황혼이 지고 있었다.“바보같은 사람, 당신은 가짜한테 속은 거예요.”“그게 어쨌다는 거야.”“여령은 어디 있소?”하나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문득 도운하는 잠든 노팔룡의 얼굴을 바라본다. 잠든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가슴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백선결은 눈을 감고 있었다.등불도 공명등이나 궁등이 아니라 팔뚝만한 황촉 몇 개가 전부여서 음산한 바람이 불자 음영이 벽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유령의 흐느적거리는 그림자를 보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처음에는 그의 손이 들어올 때마다 피하고 몸을 틀고 했지만 이미 하여령을 통하여 갈고 닦은 실력을 갖추고 있는 노팔룡의 솜씨를 어찌 당할 수 있으랴?마침내 그녀는 포기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이미 그에게 몸을 빼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순결까지도 주었는데 이제 와서 아낀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마침내 근 한 시진 동안의 피(?)가 튀기는 접전 끝에 노팔룡은 기어이 승리를 취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다.점점 더 음성이 가늘어 졌다. 하여령은 터지려는 오열을 참으며 그녀의 최후의 유언을 듣기 위해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옥가영의 음성은 점점 더 흐려지기만 했다.여륵륵은 얼른 공손한 태도를 취하며 두 여인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자신의 목 하나 쯤은 간단히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피처럼 붉은 황혼이 서경산을 물들이고 있다.1“득도하는 중이라고 했잖느냐!”칠 척(七尺)의 키, 전신은 나무처럼 비쩍 말랐